푸른 바람, 그림자 속의 고백, 그리고 먼 기억
푸른 하늘이 깔린 어느 늦봄,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사람들은 그 바람을 그저 계절의 신호로 받아들였겠지만, 나에게는 조금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푸른 바람, 어쩐지 그 표현이 딱 맞았다. 차갑지만 상쾌했고, 어디로든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가벼운 기운이 담긴 바람이었다. 그 바람은 나를 무언가 새로운 곳으로 이끌어 줄 것 같았고, 마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를 끌어올리는 느낌을 주었다. 푸른 바람은 그저 공기가 아닌, 내게 숨겨진 기억과 감정을 깨워주는 매개체였다.
한참 동안 그렇게 바람을 느끼며 생각에 잠겨있었을 때, 문득 내 앞에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강렬한 햇살이 내리쬐던 오후, 누군가의 실루엣이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림자 속의 인물이 누구인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나는 그저 그 순간을 그대로 느끼고 싶었다. 어쩐지 이 그림자는 단순한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나와 마주하게 될 무언가를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림자가 길어지고 내 앞에 멈춰선 순간, 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오래된 친구, 어쩌면 내게 진실된 고백을 털어놓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친구였다. 우리 사이는 그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으며 지내왔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마음 속에 작은 어색함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가 그림자 속에서 고백하려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그저 시간이 흘러가며 묻혀버린 이야기일까?
"오랜만이야," 그가 인사를 건넸다. 그 목소리에는 무언가 다른 색깔이 담겨 있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애틋하면서도 차분한 음색이었다. 나는 그와 함께했던 지난 시간을 떠올렸다. 고등학교 때 함께 자주 다녔던 도서관, 우스갯소리로 서로를 놀리던 운동장, 그리고 한밤중 둘만이 알던 약속 장소까지. 그와의 기억은 내가 잊고 지냈던 감정을 되살려 주었고, 내가 어쩌면 외면하고 있었던 '고백'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소 망설이듯 "그때 말하지 못했던 게 있어,"라며 고백했다.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그의 진심이 조금씩 내 앞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긴장한 채, 그의 말을 조용히 기다렸다. 고백이라는 단어는 어쩐지 묘한 설렘과 두려움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오래도록 잠겨 있었던 진심의 말들은 언젠가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일까? 아니면 서로의 그림자 속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운명을 가지는 것일까?
그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는 "미안했어"였다. 그 한 마디는 그의 마음 속에 담긴 무거운 돌덩이를 떼어내듯, 나 역시 내 마음 속에 있는 응어리가 풀리는 것을 느꼈다. 고백은 언제나 사랑의 표현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 순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는 그저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고, 이제서야 용기를 내어 그 말을 내뱉었다. 우리는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서로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마치 어둠 속에서 길을 잃었던 두 사람이 서로의 길을 밝혀주는 등불처럼.
그와의 만남이 끝나고, 나는 그 푸른 바람을 다시 한번 느끼기 위해 천천히 거리를 걸었다. 모든 것이 정리된 후의 상쾌함, 마치 새로운 시작을 앞둔 듯한 설렘이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오르고 있었다. 한 번의 고백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진 않았지만, 이제는 그와의 추억이 더욱 아름다워졌다. 때로는 누군가의 진심을 듣기 위해, 기다려야 하고, 용기를 내야 하는 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아마도 오랜 시간을 기다려 왔을 것이다. 그림자 속에서 고백할 용기를 찾기까지, 그는 스스로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 나는 그동안 내 자신도 잊고 있었던,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기억들을 떠올렸다. 먼 기억 속에서 묻혀 있던 그 순간들, 어쩌면 우리 둘만이 알고 있는 소중한 시간들이 다시 살아나면서 마음에 따뜻한 온기를 남겼다.
이제 나는 그와 나누었던 그 이야기를 품은 채, 새로운 길을 걸어가기로 했다. 푸른 바람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나는 그 바람이 불어오는 대로 내 마음을 열어두기로 결심했다. 언젠가 또 누군가가 내게 다가와 고백을 하거나, 혹은 나 스스로 고백을 하게 될 날이 오더라도, 그저 그림자 속에서 숨지 않고 진심으로 다가가겠다는 마음을 품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때로는 기다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기다림 속에서 조금씩 용기를 쌓아가는 과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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