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의 미학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채워 나간다. 그것은 물질일 수도, 감정일 수도, 혹은 경험일 수도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채운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어느 순간 과도하게 채워져서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무겁고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때가 되어서야 비움이 필요함을 깨닫는다. 그런데, 왜 우리는 비움을 두려워할까? 비움은 결코 공허하거나 쓸모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비움 속에서 진정한 자유와 평안을 찾을 수 있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우리는 늘 무언가를 가득 채워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부모님은 항상 공부를 하라고 하셨고, 친구들은 좋은 성적이나 최신 유행을 따라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때의 나는 그런 요구들에 따라 나 자신을 계속 채워갔다. 그때는 몰랐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 많은 것들이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단순히 주어진 역할을 잘 수행하고, 남들처럼 살기 위해 내 마음속에 아무런 여유도 없이 가득 채워놓았던 것이다.
청소년기에는 더욱 그랬다. 누구보다 멋지게 보이고 싶었고, 또 누구보다 잘하고 싶은 마음에 계속해서 무언가를 쌓아갔다. 그때는 조금이라도 비어 있는 것이 불안하게 느껴졌고,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더 열심히, 더 많은 것을 쫓았다. 그러나 그 열정의 끝에서 나는 결국 지쳤고, 무언가를 채운다고 해서 만족감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안에 있는 진짜 나를 찾기보다는 끊임없이 외적인 것을 쫓았던 나를 발견했다.
그때부터 비움에 대해 조금씩 생각하게 되었다. 비움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단지 물건이나 감정을 놓아버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비움은 내면의 소음과 잡념을 내려놓고, 진정한 나를 만나는 과정이다. 바쁜 일상 속에서 가끔씩 멈춰 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시간을 가지는 것, 그것이 바로 비움이다. 처음에는 이 시간이 너무 허무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동안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들어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비운 자리에 조금씩 내 마음을 채워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평온함이 얼마나 소중한지 느낄 수 있다.
비움의 과정은 그리 쉽지 않다. 우리가 오랫동안 채워왔던 것들을 내려놓는 데에는 많은 용기와 시간이 필요하다. 가령, 일상에서의 바쁨을 잠시 멈추는 것, 복잡한 감정들을 정리하는 것, 혹은 물건들을 정리하는 것 등이 모두 비움의 과정에 포함된다.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일을 하거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에너지를 소모하며 자신을 채워가지만, 그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때 오히려 더 많은 것들이 얻어지기도 한다. 그것은 물질적인 것이나 외적인 성취가 아닌, 자신만의 고요함과 여유, 그리고 진정한 자유로움이다.
내가 처음으로 비움을 실천해본 것은 몇 년 전, 물건을 정리하면서였다. 그동안 쌓여 있던 물건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다 보니, 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쌓아두고 있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특히, 내가 좋아했던 책들을 다시 꺼내 읽으면서, 그 당시의 내 마음을 떠올려보았다. 그때마다 나는 나 자신을 채우기 위해 책을 읽었던 것 같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무엇을 느끼고 싶은지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그저 많은 책들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책을 정리하면서 나는 그 안에서 중요한 것들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과감히 비워냈다. 그렇게 비워낸 공간 속에서 나는 한층 더 가벼워지고, 내 삶의 진정한 방향을 찾을 수 있었다.
비움은 결국 내 삶의 진정성을 찾기 위한 과정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사회의 압박과 타인의 기대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기 쉽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는지, 무엇이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지를 아는 것, 그것이 바로 비움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선물이다. 내면을 비워낸 후에야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있다.
비움이 주는 선물은 또한 우리의 관계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주고받고, 서로를 채워가려 한다. 하지만 그 속에서 진정한 친밀감을 느끼는 것보다, 서로의 빈 공간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편안하게 존재할 수 있는 관계가 더욱 소중하다. 비워낼 때, 우리는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각자의 공간을 존중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그렇게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삶에서 비움은 결코 끝이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채우고, 비워내며 살아간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나를 잃지 않고,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들만을 간직하는 것이다. 오늘도 나는 잠시 멈추어 서서 내 안의 비움을 실천하고, 내일의 나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간다. 그 안에서 진정한 자유와 평안을 찾으며, 비움의 미학을 하나씩 배워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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