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계절에 서서
늦가을의 낙엽이 바람에 흩날릴 때면 문득 시간이 흘렀다는 생각이 깊게 스며든다. 계절은 매년 이맘때쯤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내며, 그간 지나온 계절들의 온기와 냉기를 한 몸에 지닌 채로 다가온다. 사람들은 흔히 가을을 ‘결실의 계절’이라 부르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변화의 계절’로 다가온다. 찬란한 녹색의 여름이 깊어진 농익음 속에 스러져가듯, 우리 또한 그 속에서 알게 모르게 변화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동안의 내 모습도 낙엽처럼 조금씩 바뀌어 온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가을이 되면 유독 외출이 잦아진다. 꼭 바람을 쐬고 싶어서가 아니라, 차가워진 바람이 나를 바깥으로 내모는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코끝에 스치는 공기의 차가움은 지금 여기에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함을 깨우쳐준다. 나무들이 색을 바꿔가는 모습을 보며 문득 삶의 크고 작은 순간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우연히 찾은 카페에서 마주한 커피 한 잔이나 오래된 친구와 나눈 대화 한 마디, 심지어는 혼자 걷던 길에서 발견한 작은 나무 열매까지도 모두가 소중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 작은 순간들이 어딘가에 흔적으로 남아 지금의 나를 만들어 왔음을 깨닫는다.
어렸을 적 나는 시간이 더디게 흐른다고 느꼈다. 하루가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그리고 매일 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것처럼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 하루들이 점점 소중한 조각으로 기억에 남게 되었다. 누군가와 함께 웃고 떠들었던 순간들, 홀로 좌절하며 눈물을 흘렸던 시간들, 꿈을 꾸며 벅찬 마음으로 아침을 맞았던 날들까지, 그 모든 순간들이 그저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나에게 각기 다른 색깔과 결을 가진 ‘나무’처럼 자리 잡고 있음을 느낀다.
가을은 그런 나의 기억들을 불러일으킨다. 때로는 아련하고, 때로는 뜨겁게 다가오는 기억의 파편들이 지금의 나를 지탱해주고 있음을 깨달으며, 내면 깊은 곳에서 잊혀졌던 나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특히 가을밤의 공기 속에서 나는 나만의 작은 ‘성찰의 시간’을 가진다. 세상이 주는 조용한 밤의 고요함은 나를 그동안 바쁘게 살아온 일상에서 한 걸음 물러서서 생각하게 만든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 걸까?”, “내가 걸어온 길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 걸까?” 깊고도 묵직한 질문들이 스며들고, 그 속에서 나는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기 위해 노력한다.
가끔은 지금의 나를 다독이며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고생 많았다. 여기까지 오는 데 참 많은 일들이 있었지." 우리는 종종 앞만 바라보며 뛰어가느라 잠시 멈춰서는 것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그 멈춤의 순간이야말로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주고, 다가올 내일을 준비하게 해주는 시간임을 깨닫는다. 나무가 겨울을 준비하며 잎을 떨어뜨리고 새로운 성장을 위해 모든 에너지를 비축하듯이, 우리 또한 때로는 내려놓고 비우는 용기가 필요하다.
내려놓음은 곧 나를 자유롭게 한다. 모든 것을 가지고 가려 할 때보다 때로는 손에 쥔 것을 내려놓는 것이 더 큰 용기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얻고자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놓쳐버린 소중한 시간, 주변 사람들, 잃어버린 꿈과 열정 등은 다시 회복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을은 그런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기억하게 해주는 계절이다.
이제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대하며 맞이하고 싶다. 모든 것이 변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가을의 끝자락에서 나무가 자신을 비우고 준비하듯, 나 또한 새로운 시작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삶은 끝없는 계절의 흐름 속에 존재하며, 우리는 그 속에서 저마다의 역할과 의미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가올 겨울의 차가움 속에서도 새로운 희망을 품고, 그 희망이 다시 따뜻한 봄의 시작을 알릴 것이라 믿는다.
이 계절을 지나며 나 또한 조금 더 단단해지고, 조금 더 자유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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